계급을 넘어 사랑으로: 21세기한국영화의 상상력

아픔을 직면하고 사랑을 모색하다
2025년 뉴욕타임스가 '21세기 영화 100선'을 발표했을 때 나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말인가, 진짜인가. 봉필버그가 훌륭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기생충〉이 21세기를 대표하는 영화라니! 이를 '국뽕'으로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너무 큰 지표였다. 2000년대 이후 작품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이른바 '웰메이드' 영화들은 할리우드 문법을 가장 훌륭하게 체화한 비서구권 영화였고, 그 문법에 익숙한 국제 영화시장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었다. 오랜 리얼리즘 전통에 기반한 사회비평정신은 국제영화제를 휩쓰는 작품성의 토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자본과 계급, 이 시대의 가장 보편적 억압을 다룬 영화가 21세기를 대표하는 영화가 된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이후 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와 이창동의 〈가능한 사랑〉이 한국영화 '계급 3부작'을 완성했다. 세 영화가 계급 간의 관계와 소통을 어떻게 공간과 언어를 통해 그리는지 보면, 우리 영화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할 수 있다. 〈기생충〉에서 계급은 지상과 지하로 분리된 공간을 점유하다가, 위태로운 공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폭력적으로 폭발한다. 계급 간의 대화는 속임수와 겉치레, 아첨이다. 피를 흘리며 모스부호를 보내지만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박찬욱의 잔혹 동화 〈어쩔 수가 없다〉에서는 소통의 의지마저 상정되어 있지 않은듯 하다. 노동자들은 자본에 충성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를 제거하고, 구조를 내면화한 승자의 정신병적 웅얼거림은 바깥을 향하지 못한 채 음악 속에 묻힌다.
이창동의 새 영화는 장르 문법이나 동화적 스타일을 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다큐멘터리적 가능성을 타진한다.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못 가진 자는 벌거벗은 자존감을 지켜낸다. 서로의 사용가치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을 나누고, 해고 노동자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비싼 블라우스를 입고 가는 일이 부끄러운 일임을 배운다. 진심과 우정, 연기와 욕망 사이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가진 자와 못 가진자는 서로를 집으로 초대하고, 주먹질을 하고, "이년아" 하며 친구 먹자는 농담을 던진다. 아프고 인위적일지라도 그래도 가능한 사랑을 묻는 영화적 상상력이 고맙다.

한국 영화가 사랑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윤가은 감독의 2025년 작 〈세계의 주인〉의 영어 제목은 'World of Love'다. 1987년 헌법이 검열을 불법화한 이후 한국영화가 성폭력을 그려온 방식을 떠올린다. 참혹하다. 광주의 폭력을 성폭력당한 소녀(〈꽃잎〉)로 처절하게 은유하든, 피해 여고생의 트라우마를 주관적으로 재현하든(〈한공주〉),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시선은 여성을 두 번 죽여왔다. 그 모든 영화들에 대고 "내 인생은 그렇게 망가지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해준 주인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영화관을 나서며, 우리 사회가 이렇게 성숙해져 이런 영화를 가질수있게 되었구나, 싶어 그야말로 온 세상이 사랑으로 넘치는 '국뽕'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가능한 사랑〉과 〈세계의 주인〉 이후 등장할 한국영화가 기대된다. 아픔을 후벼 파고 피바다를 만드는 상상력을 넘어, 힘들지만 사랑을 이야기해 보자며 가만히 손 잡아주는 안정형 남자친구를 만난 듯한 설렘이다. 계엄을 겪고도 케이팝을 부르며 시위하다 늦은 밤 길거리 쓰레기를 다 줍고 집으로 돌아가 다음 날 출근을 준비하는 우리 공동체가 볼 만한 영화. 코로나 이후 회복하지 못하는 한국영화 산업이지만, 이야기의 힘으로 자본을 이겨내리라 믿는다.
글: 배원정 교수
(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Film and Media Studies 다큐멘터리 제작, 한국영화 전임강사
(전) BBC 영국방송 서울지국 프로듀서

![[영화]평온 속의 공포, <큐어>가 남긴 질문](https://static.wixstatic.com/media/0bc4c9_defc67c2665640ccbe36de39c2d5dbdd~mv2.jpg/v1/fill/w_677,h_1000,al_c,q_85,enc_avif,quality_auto/0bc4c9_defc67c2665640ccbe36de39c2d5dbdd~mv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