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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창(窓):해체와 집약, '비개인 오후'

  • 작성자 사진: Culture Today
    Culture Today
  • 9월 25일
  • 2분 분량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다

비 개인 오후 162.2 x 112.1 Acrylic on Canvas 2022, 작가제공
비 개인 오후 162.2 x 112.1 Acrylic on Canvas 2022, 작가제공

흔들림 속에서 찾은 새로운 질서, <비개인 오후>는 무수한 원형의 색점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생명, 즉 나무를 이루는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녹색과 청색의 역동적인 파동은 인상주의의 점묘를 연상시키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입체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자연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작가 개인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치열한 고민과 과도기적 성찰이 고스란히 담긴 하나의 선언과도 같다다.

작품의 출발점은 제목처럼 ‘비가 갠 어느 날 오후’의 우연한 발견에 있다. 비가 지난 후 길 위 물웅덩이에 비친 나무가, 발걸음으로 인해 생긴 물의 파동에 따라 동글동글한 형태로 해체되는 순간을 포착했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무가 물의 ‘흔들림’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본래의 형태를 잃고 무수한 원형의 파편으로 흩어지는 모습. 이것이 바로 구상이라는 익숙한 세계를 버리고 추상으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이자, 새로운 조형 언어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원형의 이미지들은 바로 그 물웅덩이에 비친 나무의 잔상이자, 기존의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가능성이 태동하는 순간의 시각적 기록이다.

이러한 조형적 전환의 이면에는 깊은 내적 동기가 자리한다. 오랫동안 구상 회화에 머물러 있던 작가는 "너만의 아이덴티티가 없다"는 남편의 날카로운 지적을 계기로 대학원에 진학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했다. <비개인 오후>는 그 성찰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손에 익은 구상적 묘사의 습관을 버리기 위해 붓 대신 튜브로 물감을 짜고, 정해진 시간 안에 작업을 끝내는 등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단순히 기법을 바꾸는 차원을 넘어,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려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따라서 작품에 나타나는 두터운 마티에르와 중첩된 색점들은 작가가 겪었던 내면의 혼돈이자,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우연이나 순수한 개념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마치 데미안 허스트의 작업을 오마주하면서도, 예술에는 작가의 ‘정성’과 ‘투신’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뿌리고 던지는 행위 이후에도 다시 붓을 들고 전체적인 형태를 다듬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그의 작품이 단순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과 진심이 집약된 ‘파인아트’여야 한다는 신념의 반영이다. 고정된 나무의 형상을 유지하면서도 그 내부를 무수한 흔들림으로 채워 넣은 것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는 열망의 상징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비개인 오후>는 비 갠 뒤 물웅덩이에 비친 나무의 흔들림이라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작가의 예술적 변곡점을 담아냈다. 이는 과거와의 결별을 고하는 선언이자, 혼돈 속에서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치열한 노력의 증거이며, 노동과 정성을 통해 예술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작가의 진솔한 태도가 응축된 결과물이다. 작품을 대면하는 이마다 흔들리는 나무 앞에서 비단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한 예술가가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숭고한 순간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글: 한은경 작가

약한 존재를 좋아하고 지키고 싶은 의지가 있다. 많은 감상자가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작가라는 말을 듣고, 그 말과 호흡하는 예술가의 삶을 꾸려왔다. 거대함 속에 작은 것, 곧 고래의 눈을 찾아가는 작가이다.


*화가의 창(窓): 캔버스를 통해 작가의 시선을 들여다보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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