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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나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 작성자 사진: Culture Today
    Culture Today
  • 2025년 12월 2일
  • 6분 분량

유럽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에서는 사람들이 연기 가득한 스모크 사우나에 모여 벌거벗은 채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병원이 생기기 전까지, 스모크 사우나는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출산의 장소이자 치유의 공간이었다. 이들에게 사우나는 액운을 씻어내고, 마음을 정화하는 일종의 성소이기도 하다.

감독 안나 헨츠(Anna Hints)는 이 사우나 안에서 여성들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카메라에 담아 다큐멘터리 〈사우나 속 여성들의 속삭임〉(Savvusanna sõsarad)으로 완성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 여성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부르는 노랫소리로 시작된다. 쿵쿵쿵, 눈 덮인 뜰에서 한 여성이 얼음을 깨고 우물을 판다. 눈과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나무집 안에는 장작불이 피어오르고, 연기가 빠르게 퍼져 나간다. 맨살이 서로 맞닿는 친밀한 접촉 속에서, 말문이 천천히 열린다.

여성들은 사우나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고, 뜨겁게 달궈진 돌 위에 걸터앉는다. 금세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땀을 뻘뻘 흘리는 가운데, 서로의 등을 박박 밀어 주고, 묵은 각질을 벗겨 준다.

카메라는 여성들의 늘어진 살, 처진 가슴, 부풀고 둔탁해진 신체 일부를 정면으로 포착한다. 햇빛을 받은 그 표면은 마치 미술관에 걸린 고전 유화처럼 빛나며, 동시에 이들이 평생 말하기 어려웠던 서사를 살짝 들어 올린다.

영국의 미술 비평가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전통 회화와 영상 속에서 여성은 언제나 “보이는 존재”, 곧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대상’이 되어 왔다고. 여성은 타자, 특히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학습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벌거벗은 몸은 더 이상 타인을 즐겁게 하기 위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 상처와 기억이 떠오르는 매개다. 카메라는 그들을 훑어보는 대신, 그들과 함께 응시하고 함께 회상하는 자리에 머문다.

         

     

어린 시절의 몸에 대한 불안은 종종 편애하는 어머니의 태도나 주위 시선에서 비롯되었다. 그 감각은 삼십, 사십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사춘기 반항기 시절, 혼자서 해 본 가장 무모한 행동은 ‘낙태’였다. 화장실 변기 위에, 혹은 병원 진료실 의자에 홀로 앉은 채, 가족에게는 한마디도 털어놓지 못한 채로.


한때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일들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사라지며, 사우나 안에서는 웃음 섞인 “무용담”처럼 공유된다.

     

사우나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들은 두툼한 양말만 신은 채 눈밭을 가로질러, 얼음이 깨진 물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가 다시 튀어나온다. 밖으로 나오면 서로에게 눈을 뿌리며 장난을 친다. 불과 얼음이 겹쳐지는 이 장면은, 그들의 삶이 지나온 극단의 온도차를 닮았다.

이야기들은 국가 대사도 아니고, 가족 간의 잔소리도 아니며, 삶의 거대한 통찰을 설교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남성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붙들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다. 과거의 상처를 지금 이 자리에서 너무 무겁지 않게, 하나의 화제처럼 꺼낼 수 있는가.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내려놓을 수 있는가.


여성들의 대화를 들으며 카메라는 늘 그녀들의 피부 일부에 시선을 머문다. 땀에 젖은 팔뚝, 아래로 처진 가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손가락, 매끈한 무릎, 꽉 쥔 두 손,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한 얼굴들…. 마치 피부 위에 얹힌 수증기처럼, 카메라는 그 모든 고통을 다시 몸 안으로 빨아들이는 듯하다.

이 지점에서 버거가 말한 “보기의 관계”는 살짝 뒤틀린다. 전통적인 시각 문화에서 ‘본다’는 행위는 곧 ‘지배’를 의미했다. 누가 시선을 쥐고 있느냐에 따라, 누가 이야기를 구성할 권리를 갖는지가 정해졌다. 그러나 이 사우나 안에서 카메라는 땀방울과 주름, 튼 살과 탄력 잃은 피부를 응시한다. 여성들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보일지를 결정하는 주체로 자리한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카메라를 매개로 스스로를 다시 바라본다. 보기의 권력은 차가운 외부의 시선에서 따뜻하고 공유된 내부의 시선으로 이동한다.


얕은 심도의 클로즈업은 마치 부드러운 손길처럼, 그들의 몸 위를 쓰다듬는다. 햇살을 받은 노화한 피부는 황금빛 낙엽처럼 아름답게 빛난다.

         

     

위에서 서술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인생의 과정’이라면,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들, 마음 가장 안쪽에 묻어 두었던 비밀이다. 때로는 가족조차도 오래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들이다.

     

수영 캠프에서 그녀는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된다. 캠프가 끝나갈 무렵, 숙소 문 앞에 그 아이가 두고 간 꽃다발이 놓여 있기도 했다. 만약 이런 설정이 평범한 드라마나 영화라면, 이 이야기는 설렘과 환상을 향해 펼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배신하지 않기로 한다. 남자친구와 먼저 헤어진 뒤, 여자아이에게 마음을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돌아온 것은 상처뿐이다. 그 과정에서 남자친구에게는 죄책감을 떠안고, 좋아했던 여자에게는 미움을 사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부모 역시 “우리 딸이 동성애자일 리 없다”며 그녀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이런 비극은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지 않는다.


또 다른 여성은 히치하이크를 하다가 한 중년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차를 외진 곳으로 몰고 가 그녀를 강간한 뒤, 도랑에 내던진다. 마침, 지나가던 두 명의 남학생이 쓰러진 그녀를 발견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고마움에 겨운 그녀가 그중 한 남학생에게 입을 맞췄을 때, 돌아온 것은 두 번째 성폭력이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어머니는 “네 얼굴로 누가 너를 그런 눈으로 보겠느냐”라고 말하며, 딸의 말을 믿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는 자신을 도와줬던 두 남학생이 검거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긴 이야기를 마친 뒤, 여자는 한동안 입을 닫고 있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는다.“나는 내 딸을 세상 모든 위험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지키고 싶어요.”


그 말을 하는 동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성은 내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다른 한 손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는다. 카메라는 몸 위에 맺힌 땀방울과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초점을 맞추며, 응어리진 감정이 조금씩 흘러나오도록 시간을 준다. 마치 부재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뒤늦은 위로를 건네는 몸짓처럼 보인다.


나이 든 여성은 자작나무 잎을 묶은 다발로 그녀의 몸을 여러 번 쓸어내리며 악령을 쫓듯 의식을 치른다. 곁에 앉은 여성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고, 기도문을 읊는다. 그 이야기들이 그녀들의 몸과 마음에 새긴 깊은 상흔은, 수없이 반복되는 스모크 사우나의 의식 속에서 조금씩 입을 연다.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열린다.

     

    

     

이 다큐멘터리의 이야기는 사우나 방 안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바깥 풍경의 변화는 사계절의 순환을 보여 준다. 겨울에는 집 앞 그루터기에서 잘라낸 돼지 다리가 줄줄이 사우나 천장에 매달리고, 이 고기는 연기에 훈연되며 천천히 말라간다. 이른 봄, 그 고기들은 이미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숙성되어 있다. 뜨거운 여름날, 여성들은 사우나에서 나온 뒤 맨몸으로 잔디밭에 드러누워 배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거나, 연못 한가운데까지 헤엄쳐 나가 물장난을 친다.

     

    

     

감독 역시 에스토니아 출신이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무려 7년이 걸렸다. 더 좋은 촬영 각도를 찾기 위해, 그는 먼저 자신을 실험대 위에 올렸다. 스스로 사우나 안에 들어가 카메라에 몸을 맡기며, 촬영의 감각을 시험했다. 그러나 진짜 어려운 것은 기술이 아니라 신뢰였다. 감독이 여성들과 가까워지는 과정 속에서, 이 공간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말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수치심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감독과 어머니의 관계는 경직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사찰을 찾았다가, 그는 깨닫는다. 막상 말을 하려 하니, 공적인 공간에서는 도무지 속마음을 꺼내기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연약함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중에 스모크 사우나 안에서, 할머니가 과거 가정폭력의 경험을 털어놓는 순간을 듣게 되고, 이 영화의 공간을 사우나로 확정한다.


사우나 방은 하나의 액자와 같다. 이 액자 안에 담긴 것은 여성들의 은밀한 수다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 흘러나오는 그들의 연약함이다.

햇빛 아래 드러난 붉은 자국, 튼 살, 기미와 반점은 더 눈에 띄게 도드라진다. 그러나 관객이 이 몸들을 바라볼 때 떠오르는 감정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다. 오히려 되묻게 된다. 이 몸 위에 남은 깊은 자국들이, 도대체 어떤 시간을 통과한 끝에 새겨졌는지.

버거는 “보기는 결코 무고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는 결국 우리가 놓인 사회적 위치에 달려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 보기의 방향을 아주 부드럽게 바꿔 놓는다. 더 이상 ‘판단하는 눈’에서 출발하지 않고, ‘귀 기울이는 눈’에서 출발하도록.

     


그리고, 필자는 며칠 전, 한국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았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역시 성폭력 피해자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애를 하고, 친구들과 성인 만화를 이야기하며 웃어넘긴다. 그러던 어느 날, 성폭력 가해자의 ‘원래 동네 복귀’를 반대하는 청원서에 쓰인 한 문장이 그녀를 깊게 찌른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삶을 영원히 파괴할 수 있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긴다.” 그제야 그녀는 더 이상 농담으로 무마하지 못하고,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영화에는 인상적인 세차 장면이 등장한다. 차 안에서 주인공과 어머니는 거칠게 언성을 높이다 결국 오열한다. 밀폐된 공간 바깥에서는 거센 물줄기가 폭풍처럼 차를 덮치고, 내부에서는 오래 참아 왔던 울음이 폭발한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은 이런 닫힌 공간 안에서만 겨우 소화된다. 밝고 경쾌한 청춘의 이미지들은, 사실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억지스러운 외피에 가깝다.

그러나 상처를 피하려고 숨죽이며 사는 것보다, 주인공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살아보는 것이다. 남들의 뒷말 속에서도 사랑을 해 보고, 친구들과 자유롭게 섹슈얼한 농담을 주고받고, 남자 동급생들과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놀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 인물의 낙관과 용기에 고개가 숙여진다. 상처는 결코 완전히 아물지 않지만, 그는 그 상처를 끌어안은 채 진실을 드러낸 이후의 세간의 시선과 소문을 감당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문득, 이런 사람이 영화 밖 현실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이처럼 사적인 말들과 고통은 여전히 대부분, 사적인 공간에서만 꺼내어 만져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라는 공적 매체를 통해 멀리 퍼져 나가는 것은, 이 속삭임과 고통이 더 먼 곳까지 닿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주인〉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이 받는 쪽지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여 만들어진 메시지이다.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를 기록함으로써, 영화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힘을 전해 준다.


언젠가 여성들이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다시 꺼낼 때, 그것이 더 이상 사우나 안이나 자동차 안에서만, 서로를 조용히 위로하는 방식으로 소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적 공간에서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화제가 되기를 바란다.

여성들 사이의 속삭임이 공적 공간 안으로 옮겨지는 것 자체가 일종의 말하기 권력을 되찾는 행위이기도 하다. 많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다룬 영화들은, 영화가 되기 전에 이미 “끔찍한 사건”으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경우가 많다. 영화는 사회적 불의와 분노를 부각시키지만, 정작 피해자가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은 뒷전으로 밀리기 쉽다.


버거는 매체가 여성들을 항상 같은 방식으로 재현할 때, 관객 역시 그 프레임 안에서만 여성들을 보도록 길들여진다고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사우나 속 여성들의 속삭임〉과 〈세계의 주인〉 같은 작품은, 아주 조용하지만 분명한 전환을 제안한다. 이들은 여성들을 ‘피해자 이미지’로만 소비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욕망하고, 여전히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지 선택하는 주체로서 제시한다.


이 속삭임들이 사회적 이슈로 폭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두 편의 영화는, 대중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여성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통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목소리 역시 충분히, 그리고 간절히 들을 가치가 있다.

언젠가 바람이 부는 평온한 날, 그들의 웃음소리가 사우나의 나무벽을 넘어,자동차 안을 지나, 세상 곳곳으로 울려 퍼질 것이다.

    




글 : 객원기자 秋麓(뢰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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