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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Talk & Critique] 박유빈 작가

  • 작성자 사진: Culture Today
    Culture Today
  • 17시간 전
  • 7분 분량


물질의 질서에 남은 인간의 기록 - 박유빈의 행위, 흔적, 조각


박유빈, 〈Entangled Form〉, 2026, 나무, 함석판, PLA, 조형토, 스테인레스 스틸, 172x120x190cm.
박유빈, 〈Entangled Form〉, 2026, 나무, 함석판, PLA, 조형토, 스테인레스 스틸, 172x120x190cm.


Ⅰ. 흙과 불이 가르친 질서

무질서란 하나의 질서가 다른 질서의 작동 방식을 읽어내지 못하는 순간에 붙는 이름일 수 있다.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체계를 만들고, 그 체계 안에서 삶을 지탱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이 손을 뻗을 수 있는 영역은 다분히 제한적이다. 그 바깥에는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으며, 때로는 언어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

 흙은 마르고 수축하며 자신의 형태를 바꾸고, 불은 온도와 시간에 따라 표면에 예측할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철은 산화와 부식을 통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속도의 시간을 드러낸다. 박유빈이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에서 경험해 온 자연의 풍경은 인간의 것과는 다른 리듬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체감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은 의식 너머에 놓인 광활한 외부이면서도, 인간이 언제나 그 안에서 살아가고 반응할 수밖에 없는 공존의 장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질서 안에서 인간의 행위는 어디에 속하는가. 세계 위에 남은 흔적을 단순히 인간 의지의 표상으로 읽는 순간, 우리는 쉽게 순환 논증에 갇힌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몰이해이자, 인간의 행위가 놓이는 자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해석이기도 하다.

 박유빈의 조각은 바로 이 자리에서 출발한다. 서로 다른 질서가 만나는 접면, 그곳에서 물질과 신체는 서로를 시험한다. 작가가 다루는 흙과 철, 불과 시간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순순히 배열되는 재료라기보다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반응하는 존재들이다. 박유빈은 이처럼 광활한 세계 속에서 매 순간 벌어지는 미시적인 반응들에 주목하며, 이때 조각은 인간이 다른 존재와 조우하는 방식의 기록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신체의 감각, 물질의 반응이 서로를 감지하며 잠정적으로 남긴 흔적이다.



Ⅱ. 시스템 안의 인간 : 반복의 단위와 신체의 의지

실재의 공간을 점유한 몸은 존재를 사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매개다. 몸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음’을 물리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단위이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고 다음 행위를 준비한다. 박유빈이 주목하는 신체는 물질과 교감하고 저항을 감지하며, 그 반응과 조율하는 가운데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이어간다. 인간의 신체 행위는 과거의 감각을 현재의 행동 속에 품고, 현재의 접촉을 통해 미래의 움직임을 예비하는 지속의 단위가 된다.

 〈16시간 27분〉(2023)과 〈Bite〉(2023)에서 신체는 물질을 다루는 주체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과 직접 맞부딪히는 감각의 장으로 이동한다. 전자에서 작가는 흙으로 만든 굴 안에 들어가 장시간 벽을 긁어내며 물질의 내부에 머문다. 후자에서 입은 말이나 의미를 산출하기 이전에 흙이라는 물질을 감각하고 절단하는 원초적인 신체의 층위로 등장한다. 벽에 새겨진 자국과 표면에 남은 잇자국은 각각 신체가 물질과 관계 맺은 특정한 시간과 감각을 환기하는 지표적 흔적이 된다. 행위가 종결된 이후에도 그것이 남긴 압력과 저항은 물질 위에 응고되어 있다. 흙은 그 순간을 보존하고, 조각은 작가의 신체가 지나간 궤적을 환기하며 지금-여기에서 부재하는 행위를 역으로 증언한다.

 〈유한성〉(2025)은 작가가 흙덩어리를 붙잡고 공중에 매달리다 미끄러지고, 다시 뛰어올라 붙잡기를 반복하는 퍼포먼스이다. 아무런 지지체 없는 상태에서 중력은 몸을 끌어내리고, 신체는 그 한계 앞에서 계속해서 추락한다. 그러나 이 실패와 재시도의 연속은 인간이 자신보다 큰 질서와 전면으로 맞닥뜨리려는 의지의 발현으로 읽힌다. 작가는 다시 몸을 던진다. 통제할 수 없는 조건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물질과 접촉하고자 하는 이 반복 행위는, 존재를 확인하는 동시에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묻는 신체의 지속으로 나타난다.

 신체의 반응은 언제나 철저한 이성의 영역 안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몸은 때로 사고보다 먼저 반응하고, 익숙한 자극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의식적 반응이 자동성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지는 신체의 반응을 완전히 지배하는 정언 명령으로 존재하기보다, 물질의 저항 앞에서 다시 조정하고 시도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생명 있는 신체의 반복은 하나의 행위 다음에 또 하나의 행위가 뒤따르는 산술적 순서에 그치지 않는다. 반복은 안정된 구조를 만드는 동시에 그 구조를 미세하게 비튼다. 일견 신체에 각인된 습관의 체계와 맞닿아 있을지라도, 박유빈의 작업에서 반복은 나태한 자동성이나 권태와 거리가 멀다. 그것은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견디고 다시 물질 앞에 서며, 아직 알 수 없는 결과를 향해 몸을 내미는 작가의 담대하면서도 성실한 성향에서 비롯된다. 이는 작가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자, 그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구성해 나가는 조각적 의지로 이어진다.


작업과정_사진 박유빈
작업과정_사진 박유빈

Ⅲ. 신체의 개입과 행위의 기록 : 몸이 물질에 남긴 시간

행위는 이미 종결되었지만, 그 행위와 접속한 물질은 여전히 특정한 시간과 신체의 흔적을 간직한다. 박유빈의 조각은 이 사후적인 상태에 주목한다. 물질 위에 남은 압력, 긁힌 자국, 부식된 표면, 용접 후 남은 작은 잔여물은 사라진 행위의 자국으로 기능한다. 조각은 현재 눈앞에 놓인 물체이면서 동시에, 한때 그곳을 통과했던 몸의 시간을 증언하는 지표가 된다. 따라서 박유빈의 조각은 물질의 변형과 저항, 신체의 동세가 얽히며 만들어내는 시간적 층위 속에서 형체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존재한다. 행위와 물질,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점은 조각의 표면 위에서 계속 맞물리며 하나의 열린 장을 이룬다.

 이 점에서 박유빈의 조각은 퍼포먼스의 과정적 성격과 맞닿으며, 비물질적인 행위와 물질로서의 조각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간다. 작가의 퍼포먼스는 조각이 되기 위한 예비 단계가 아니라, 조각이 발생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작가의 신체는 물질과 함께했던 특정한 시점을 공유하며, 이와 함께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관객은 작품의 표면을 통해 작가의 몸이 지나간 시간, 물질과 부딪힌 순간, 그리고 그 접촉이 남긴 감각의 밀도를 역으로 추적한다. 조각은 삶으로부터 떠낸 주물처럼, 한때 존재했던 행위의 밀도를 간직한다.

 〈기억〉(2025) 연작에서 시간은 물질의 표면을 통과하며 남는다. 여기서 기억은 관념이나 서사로 직접 설명되기보다, 흔적과 얼룩, 표면의 변화로 나타난다. 작가가 평면 위에서 재료를 다루는 과정은 명확한 이미지를 완결하기보다 재료와 접촉한 시간의 층위를 압축한다. 기억은 그 표면 위에서 일시적으로 가시화된다. 물질에 남은 불완전한 자국은 언제나 온전히 붙잡히지 않는 시간 속에서 기억이 열린 결말과 열린 서사의 형태로 남는 방식과 닮았다.

 〈Traces of Gravity〉(2025)에서 용접 후 남은 잔여물들은 일반적으로 제거되거나 정리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평면 위에 놓이는 순간, 잔여물은 조형의 주변부가 아니라 작업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용접의 열, 금속의 접합, 중력에 의해 떨어지고 굳은 물질들은 제작 과정이 남긴 부산물이면서 동시에 그 행위를 가장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흔적이다. 작가는 정제된 결과를 위해 제거되는 부산물을 다시 불러와, 행위가 남긴 물질적 시간을 조각의 본질로 전환한다. 이때 물질은 행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 행위를 다시 읽게 하는 증거가 된다.

 〈X-space〉(2024)에서 녹슬고 변색된 철 기둥은 이러한 시간의 지표성을 공간 전체로 확장한다. 일정하게 배치된 기둥들은 구조적 질서를 형성하고, 그 표면을 잠식하는 녹과 부식은 그 질서 안에 다른 시간의 흐름을 각인한다. 관객은 기둥 사이를 거닐며 자신의 몸으로 조각 내부를 통과한다. 다시 말해 이 작업은 시각적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신체가 그 안을 지나가며 감각하는 공간적 사건이 된다. 철의 표면에 남은 시간과 관객의 이동하는 몸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조각의 경험을 구성한다. 그리고 각기 다른 존재의 선을 그리며 나아가던 인물들과 그들의 행위, 물질은 이 안에서 접점을 얻는다.

 이처럼 박유빈의 조각은 행위가 물질로 전이되고, 물질이 다시 행위의 흔적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행위가 사라진 뒤에 남은 것은 부재가 아니라, 물질 위에 응고된 시간이다. 조각은 그 흔적들을 통해 부재한 몸을 현재의 감각으로 불러오며, 관객에게 행위의 지나간 시간을 다시 경험하게 한다. 작가가 설정한 반복과 규칙은 작업을 일정한 구조, 곧 작가가 “시스템”이라 일컫는 세계의 작동 원리를 상정하지만, 물질의 반응과 신체의 불완전성은 그 구조 안에 가변성을 만든다. 그리고 조각은 그 사이에서 신체가 세계와 접촉하며 남긴 존재의 자국으로 남는다.


작업과정_사진 박유빈
작업과정_사진 박유빈

Ⅳ. 질서의 틈과 물질의 응답 : 통제와 불확실성 사이의 조각

인간은 세계를 측정하고, 고정하고, 배열함으로써 예측할 수 없는 조건을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박유빈의 조각에서 인간은 세계 바깥에서 모든 것을 조망하고 통제하는 주체로 서지 않는다. 박유빈의 작업은 거시적인 질서를 구성하는 각 존재들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흙, 철, 신체, 손의 흔적은 모두 서로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작동하며,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변화와 편차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물질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의 표지가 아니라, 거대한 세계 안에서 인간 역시 하나의 존재로서 물질과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인간 또한 세계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불확실한 변수로 작동한다. 이 불확실성은 박유빈의 조각, 나아가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에 활력을 부여한다. 물질의 우연성과 인간의 불완전한 판단이 맞물리는 순간, 조각은 정해진 질서를 따르기보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형상을 향해 나아간다.

 〈Grasping at Bloom〉(2026)은 이러한 세계관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이 작업에서 세계의 긴장은 구체적인 구조물의 형태로 드러난다. 수직과 수평의 구조, 볼트와 너트, 자와 지지대는 조각을 지탱하는 조건이면서 동시에 조각을 규격화하려는 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질서의 한가운데에서 물질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흙처럼 뭉친 덩어리는 매끈한 구조를 따르지 않고, 금속의 녹은 시간의 얼룩을 드러내며, 유기체를 닮은 형상은 지지대 사이에서 비스듬히 기울어져 흘러나온다. 측정의 장치와 측정되지 않는 덩어리, 고정하려는 구조와 새어나가는 물질이 한 장 안에서 서로를 밀고 당긴다. 이처럼 세계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정돈된 체계라기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반응과 속도를 지닌 채 부딪히고 조정되는 사건들의 연속에 가깝다. 인간의 의미 역시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역사와 세계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판단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건 사이에서 다른 방향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From the Trace of Hand〉(2025)는 손의 흔적으로부터 조각적 세계가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중심부의 덩어리로부터 고전적 오브제와 기념비적 구조물, 금속 조각, 신체의 일부처럼 보이는 형상들이 뻗어나온다. 각 요소는 모두 손의 행위로부터 비롯된 생성의 운동에 뿌리를 둔다. 손은 물질을 움켜쥐고, 누르고, 변형시키는 가장 직접적인 접촉의 기관이다. 이때 손의 흔적은 서로 다른 물질과 형상들이 파생되는 조각적 근원이 된다. 물질은 신체의 감각과 시간을 매개로 자신의 질서를 드러내고, 조각은 그 운동의 흔적을 응축한 형상으로 남는다.

 따라서 박유빈의 조각은 완성된 체계의 형상이 아니라, 체계가 작동하는 도중의 균열로부터 가능성을 찾는다. 통제와 불확실성, 구조와 편차, 인간의 판단과 물질의 응답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조각은 닫힌 결과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관계의 장으로 펼쳐진다. 인간과 물질은 모두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상수가 아니라 변수로 작동하며, 바로 그 불확실성 속에서 조각은 새로운 가능성을 얻는다. 박유빈의 시스템은 이 예측 불가능한 존재들의 움직임을 억누르지 않고, 그것들이 서로 부딪히고 균형을 찾아가며 잠정적인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조각으로 드러낸다.

 


Ⅴ. 흔적으로 남은 인간적인 조각

반복 속에서 편차가 생기고, 문제 앞에서 의식은 비로소 명료해지며, 실패 이후에도 손은 다시 물질에 개입한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시간선, 예측할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인간은 확신 없이도 판단하고 행동한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반복한다. 이 불완전성은 인간의 필연적인 한계이면서 동시에 가능성이다. 세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고, 물질은 인간의 의지를 그대로 받아 적지 않음에도, 바로 그 어긋남과 단차 속에서 새로운 형상의 가능성이 발생한다. 반복 속의 편차, 구조 안의 균열, 물질이 예기치 않게 되돌려주는 반응은 모두 작가가 작업을 한계 없이 열어젖히는 힘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유빈의 조각은 닫힌 질서의 형상이 아니라, 질서 안에서 미래를 향해 열리는 감각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완성을 유예하고 꾸준한 변형을 택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운동에 가깝다. 박유빈의 조각은 알 수 없는 삶을 향해 반복하는 신체가 남긴 탈주의 기록이며, 물질의 질서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리를 다시 묻는 방식이다. 조각은 그 시스템 속에서 인간의 삶과 존재들 간 접촉을 기록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불확실한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의 흔적으로 남는다. 박유빈의 조각이 인간적인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것은 불안한 삶 속의 불완전함을 제거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여백과 가능성을 물질 위에 새긴다. 불안과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이 역설적 가능성은 박유빈의 조각을 하나의 완결된 세계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계속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형식으로 남는다.



글: 정미현(독립기획자)


[Artist Talk & Critique]

작가와 작품을 단정하거나 선언하는 문장들, 혹은 작품보다 비평가의 해석이 앞서는 글들이 있다. 이 지면에서는 그러한 방식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작업의 기조를 규정하기보다 작가의 말과 작품 사이를 오가며 그 세계가 구성되는 방식을 되짚는다. 작품은 작가가 세계를 인식하고 다루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언어이며, 그 이면에는 언어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개인의 감각과 태도가 놓여 있다. 작업은 결국 그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은 하나의 완결된 비평과 그 비평을 경유해 다시 읽히는 인터뷰로 구성된다. 비평은 작품과 작가를 면밀히 들여다보며 작업을 이해하는 하나의 경로를 제시하고, 인터뷰는 작업 과정에서 드러난 단서이자 흔적으로 다뤄진다. 작가의 작업 세계와 그것을 드러내는 언어,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비평의 움직임을 함께 살피며, 동시대 작가들의 시선을 하나의 방식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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