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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번의 실 겹침이 자아낸 침묵의 심연, 그 속에서 고동치는 ‘붉은 숨결’

  • 작성자 사진: Culture Today
    Culture Today
  • 5월 18일
  • 2분 분량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밀도 높은 정적(靜寂)이 관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거친 질감의 노출 콘크리트 바닥과 대비를 이루는 하얀 화이트큐브의 벽면. 그 위로 일정한 호흡을 가지며 정렬된 검은 사각형의 입체들이 내뿜는 에너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단출한 나무 벤치 하나만이 놓인 이 미니멀한 공간에서 관객은 시각을 넘어 온몸으로 전해지는 물성의 무게와 마주하게 된다.

《무(無)의 심연, 맥(脈)의 도래: 텅 빈 숨결, 붉은 선의 존재론》이라는 다소 무거운 표제를 내건 이번 전시는 섬유라는 유연하고도 따뜻한 매체가 어떻게 하이퍼 미니멀리즘(Hyper-Minimalism)의 날카로운 정신성과 동양적 사유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풍원곤 섬유회화전시전경:아트스페이스노 제공
풍원곤 섬유회화전시전경:아트스페이스노 제공

무한한 반복의 노동이 도달한 역설, ‘충만한 비어있음’

풍원곤의 작업은 언뜻 보면 단순한 검은색 릴리프(부조) 회화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작품에 가까이 다가설 때 비로소 드러나는 표면의 결은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캔버스를 촘촘하게 메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수만 번 겹쳐지고 쌓인 ‘실’의 궤적이다.

작가는 과거의 맥시멀리스트(Maximalist)적 문법을 과감히 탈피하고, 수련과도 같은 끊임 없는 비움의 과정을 선택했다.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이 촘촘한 밀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거대한 '무(無)'의 공간, 혹은 우주의 근원적인 진공 상태를 연상시킨다.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공(空)',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충만한 비어있음'의 역설이 작가의 지독한 노동집약적 수행성을 통해 시각화된 것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아트스페이스노 주희현 관장은 “검정 또는 흰색의 바탕은 단순한 색과 면이 아니라 침묵하는 진공 상태를 상징한다”라며, “채움으로써 도리어 비워내고, 비워냄으로써 비로소 실존을 드러내는 미니멀리즘적 정수”라고 평했다.

풍원곤 섬유회화전시전경: 아트스페이스노
풍원곤 섬유회화전시전경: 아트스페이스노

     

침묵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붉은 선, 실존의 맥박

작품의 핵심적인 긴장감은 검은 심연을 뚫고 솟아오른 미세한 ‘붉은 선’에서 촉발된다. 생명의 상징성을 담은 재료를 탐색한 끝에 얇고 긴 틀에 부어져 만들어진 시멘트 부조는 언뜻 강한 듯 보이나 부숴지기 쉬운 특성을 가졌다. 이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생명의 섬광이자, 작가가 포기하지 않은 실존의 궤적이다. 벽면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배치된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붉은 선들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맥(脈)'으로 이어지며 전시장 전체에 숨결을 불어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끝없는 허무와 침묵 속에서 비로소 고개를 드는 생명의 박동, 혹은 구명줄과도 같은 희망의 은유다.

전시장의 조명 아래 잔잔한 그림자를 드리운 작품들은 관객에게 단순히 '보는' 시각적 경험을 넘어, 손끝으로 만져질 듯한 촉각적 긴장감을 선사한다. 거대한 여백 속에 자신을 대면하게 만드는 이 기묘한 공명은, 오색찬란한 세상에 피로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육체적 지각의 회복을 제안한다.

     

한·중 문화예술 교류의 새로운 가교를 기대하며

작가 풍원곤은 홍익대학교 섬유예술학과에서 학사부터 석사, 박사 학위까지 모두 마친 재원이다. 한국 미술계의 현대적 어법을 흡수하면서도 대륙적 스케일과 동양적 정신의 깊이를 잃지 않은 그의 독특한 작품 세계는 이러한 배경에서 기인한다.

이번 전시는 아트스페이스노의 ‘2026년도 신진작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되었으며, 특별히 한중문화예술교류원(KCCC)과의 공동 개최를 통해 양국 문화 교류의 의미를 더했다.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 하나로 맥시멀리즘에서 하이퍼 미니멀리즘까지 치열한 작가 정신의 외길을 걸어온 한 젊은 예술가의 이정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전시장에 놓인 목재 벤치에 앉아 가만히 벽면을 응시해 보라. 정적 속에 팽팽하게 당겨진 붉은 선이 당신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올 것이다. "당신의 생명은 지금 어떤 궤적으로 흐르고 있는가."

     

[전시 정보]

전시명: 풍원곤 섬유 회화전《무(無)의 심연, 맥(脈)의 도래: 텅 빈 숨결, 붉은 선의 존재론》

일시: 2026년 5월 18일(월) ~ 5월 30일(토)

장소: 아트스페이스노 (서울 중구 퇴계로36나길 30)

주최/주관 :아트스페이스노, 한중문화예술교류원(KCCC) 공동 개최


글: 조이(문화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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