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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문화 _ 영화로 읽는 몸에 관한 성찰3

  • 작성자 사진: Culture Today
    Culture Today
  • 10월 30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일 전

잠들지 못하는 몸, 무너져가는 정신 – 영화 <잠>


사진출처 : 영화 <잠> 포스터
사진출처 : 영화 <잠> 포스터

영화 <잠>은 단순히 공포 스릴러로 소비하기에는 너무 많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주는 진짜 섬뜩함은 귀신이나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몸이 정신의 통제를 잃었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남편 현수는 낮에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지만, 밤이 되면 잠 속에서 낯선 몸으로 변하게 된다. 그 몸은 무의식적으로 가족을 위협하고, 결국 아내 수진을 끝없는 불안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서 드러나는 공포는 정신이 부재한 몸은 더는 자기 것이 아니라는 근원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영화가 진정으로 충격을 주는 지점은 남편 현수의 변화뿐만 아니라, 아내 수진의 변화다. 수진은 남편의 몽유병을 감시하기 위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서서히 정신과 육체가 함께 무너져간다. 그녀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피폐해지고, 다크서클은 짙어져 간다. 이 외적 변화는 단순한 피곤의 흔적이 아니라, 정신이 몸을 어떻게 극명하게 지배하는지 보여주는 신호탄인 셈이다. 영화 초반의 수진은 사람 하나 해치지 못할 것 같은 지극히 평범하고 무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잠식되고 피폐해지자, 그녀의 몸은 스스럼없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하게 된다. 마지막에 전동 드릴을 쥔 채 상대를 살해하려는 수진의 모습은 파괴된 정신이 몸의 행위를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라는 오래된 명제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우리는 흔히 몸이 정신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소소한 습관이나 태도에 빗대어 말한다. 우울할 때 어깨가 처지고, 자신감이 넘칠 때는 걸음걸이가 당당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잠>은 이 상식을 훨씬 더 급진적이고 무서운 차원으로 끌고 나간다. 정신이 피폐해지고,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절망에 잠식되면, 몸은 내가 그동안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순식간에 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정신은 단순히 몸을 통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몸의 행동을 극적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는 근원적 힘인 셈이다.


‘나는 내 몸을 온전히 내가 지배하고 있는가?’

현대 사회에서 몸은 끊임없이 사회적 규범과 압력 속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몸을 씻고, 꾸미고, 단정히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산다. 이러한 규범은 단순한 생활 습관이 아니라, 사회가 끊임없이 주입한 규율이 정신 속에 각인된 결과다. 결국 그 습관화된 정신이 몸을 다시 지배한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했듯, 사회는 학교, 군대, 가정 같은 제도를 통해 몸을 훈육하고 길들이며 규율화된 몸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영화 <잠>은 사회의 규율이나 제도보다 더 강력하게 몸을 통제하는 것은 바로 피폐해진 개인의 정신임을 보여준다. 수진이 결국 폭력적 몸짓을 취하게 된 것도, 사회적 규율이나 제도와 상관없이 온전히 그녀 자신의 피폐해진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몸의 관계를 둘러싼 오래된 철학적 논쟁은 이 영화 안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데카르트는 정신을 지배자로, 몸을 기계적 도구로 보았다. 영화는 이 명제를 재확인한다. 의식이 없는 현수의 몸은 위태롭고, 피폐해진 수진의 정신은 몸을 극단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현상학적 질문도 남긴다. 몸은 정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아니면 몸과 정신은 서로에게 침투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인가?

정신이 맑고 건강할 때 몸은 자유롭고 안정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정신이 피폐해지고 붕괴되면, 몸은 낯선 괴물로 돌변한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진짜 공포는 귀신의 그림자가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의 정신을 잃는 순간, 내 몸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섬뜩한 진실일 것이다.



글 : 손예림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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